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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나눔 실천의 삶 살아온 기업인

앨라이드 테크놀로지 그룹 창립자 및 고문인 이덕선(사진) 한국외대 해외동문연합회 이사장이 지난 11일 별세했다. 향년 84세.     이덕선 이사장은 한국외대 해외동문연합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이덕선 이사장은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시작, 1986년 앨라이드 테크놀로지 그룹(ATG)을 설립, 미국 국무부 전산망을 책임지는 기업인으로 성장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나눔은 결국 더 큰 결실을 맺는다'는 평소 철학에 따라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재단인 'Matthew D. & Katherine H. Lee Foundation'을 설립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왔다.   이러한 공로로 2004년 한국외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에는 메릴랜드 주 정부가 수여하는 '최우수 기업 100대 경영자상(Top 100 Minority Business Enterprise's Business Legend Award)'을 수상했다.   또 인류에 공헌하는 글로벌 인재 양성을 염원하며 12년간 거액의 장학금을 후원해왔다. 지난 2022년 한국외대에는 장학금 100만 달러를 추가로 기탁해 이덕선 이사장이 출연한 장학금 총액은 40억 원에 달한다.   유가족으로는 아내 캐서린 이씨와 두 딸 소피, 퍼트리샤씨가 있다. 장례미사는 지난 13일 오전 11시 메릴랜드주 성 유다 성당에서 열렸다.   ▶연락:(301)946-8200삶과 추억 나눔 외대해외동문회 한국외대 해외동문연합회 이덕선 이사장 나눔 실천

2024-04-14

[삶과 추억] 민용순 UC어바인 미술과 교수, 아시안 이민자 정체성 탐구

아시안 이민자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한인 작가 민용순(사진) 교수가 지난 12일 LA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 70세.   LA현대미술관의 앤 엘레굿 디렉터는 14일 성명을 통해 “수년간 자문위원으로 봉사하며 지혜와 관대함, 협력 정신을 보여준 민용순 선생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라며 고인의 사망 소식을 발표했다.     사망 전까지 UC어바인 명예교수이자 LA현대미술관 예술가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고인은 1953년 한국 부곡에서 태어났다. 196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고인은 UC버클리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81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고인은 1980년대 말 미국에 아시안 미술가들의 정체성을 견인한 작가이자 미술을 매개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행동주의 미술가이자 전시기획자로 이름을 떨쳤다.     초기작 ‘자기 만들기’(1989)는 미국 내 소수자였던 아시안 이민자의 왜곡된 정체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가리는 것으로 이민자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반영했다. 1993년부터 UC어바인 미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전 세계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저기: 이산의 땅’ 전시 프로젝트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 및 심포지엄에 참여하고 기획했다.       그는 이민 1세와 2세 작가들이 창작한 디아스포라 미술을 소개하고 알리는 데 앞장섰으며 여성 작가들의 정체성 활동에 관심을 쏟았다. 고인도 한복, 보따리 등 한국 여성과 관계되는 고유의 모티브를 활용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한인뿐만 아니라 아시아 정체성으로 시각을 확장한 퍼포먼스 설치작품을 구상했으며, 한국 내 외국 노동자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삶과 추억 민용순 어바인 아시안 이민자 아시안 미술가들 민용순 uc어바인

2024-03-14

[삶과 추억] 공립학교 한국어 교육 발전에 헌신

오렌지카운티의 명문 고등학교로 알려진 옥스퍼드아카데미에 한국어 붐을 일으켰던 한인 교사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한인 교육자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한인 교육자들에 따르면 옥스퍼드아카데미 한국어 교사 데이비드 김(한국명 김재민·사진)씨가 지난달 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53세. 김씨는 5년 전부터 디스크 증세로 고생해왔으며, 작년부터 학교를 휴직하고 치료에 전념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정은 남가주 한인 교육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학생들이 대입 지원 시 혜택받을 수 있도록 ‘외국어국가시험(NEWL·이하 뉴얼)’ 한국어 시험을 가장 먼저 도입했으며, UC로부터 학점 계산에 사용되는 ‘가중 학점(Weighted GPA)’ 과정으로 승인을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정규 공립학교 한국어 교사들에게 뉴얼시험을 한국어 AP과정 대안으로 제시해 한국어 교육이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왔다.   옥스퍼드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사용하는 온라인 자매학교 ‘케임브리지 버추얼 아카데미’를 개설할 때도 한인 학생들에게 등록 기회를 더 제공하도록 한국어 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학교 발전에도 기여했다.     주말에는 일본계 교회에서 부인 아키코 김씨와 함께 청소년 사역자로 봉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한인교육자연합회(IKEN) 김성순 회장은 “주중에는 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주말에는 일본계 교회에서 청소년들을 지도해온 훌륭한 교사였고 집에서는 노부모를 모시고 살던 훌륭한 아들이었다”며 김씨를 추모했다.   이어 김씨의 가족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를 돕기 위해 고펀드미를 통해 기금모금을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의 아내가 지난달 말 개설한 고펀드미에는 현재까지 1만5200여 달러의 후원이 이뤄졌다.     김 회장은 “한국어 전파를 위해 앞장섰던 분이다.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한마음으로 도와줬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한편 옥스퍼드아카데미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오는 3월 8일 오후 3시쯤 학교 앞에서 김 교사의 사망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 예정이다.   ▶고펀드미: https://gofund.me/db2ac640 장연화 기자삶과 추억 공립학교 한국어 옥스퍼드아카데미 한국어 한국어 교육 한국어 ap과정

2024-02-13

[삶과 추억] 외롭고 지친 이들 위로한 사역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이하 마가교회)를 이끌어 온 채동선(사진) 전도사가 15일 오전 4시 48분 카이저병원에서 별세했다. 62세.   유가족에 따르면 고인은 그동안 위암으로 투병하다 암이 간 등으로 전이돼 숨을 거뒀다.   고인은 생전 마가교회를 LA와 오렌지카운티 두 곳에 개척해 전도 활동에 앞장섰다. 지난 22년 동안 마가교회를 이끌며 이민생활 가운데 외롭고 힘겨움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고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30대 때 사업실패와 우울증에 시달린 뒤 신학에 매진해 마가교회를 개척했다.     고인은 지난해 1월 신년말씀 집회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사랑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소 “내 묘비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이 용서한 자’라고 적고 싶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고인은 총신에서 헌법과 교회사를 가르친 채기은 목사의 손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채정민 목사의 증손자다. 유가족으로는 아내가 있다. 고인 장례 일정은 현재 협의 중이다.     ▶연락처: (626)786-1814 김형재 기자삶과 추억 사역자 위로 생전 마가교회 예수 그리스도 이하 마가교회

2024-01-15

[삶과 추억] 한국 과학기술 발전 헌신…이동전화 기술 첫 상용화

서정욱(사진) 전 과학기술부 장관이 11일(한국 시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서 전 장관은 한국의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해 일평생 헌신해왔다. 특히 한국에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방식의 이동전화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그는 평소 “초근목피와 보릿고개라는 말이 회자하던 때, 나라를 부흥하는 데 과학기술자로서 참여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과학과 공학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것이라 여겼다. 40년간 과학기술자로서 공직 생활에 몸담았던 이유다.   서 전 장관은 박정희부터 김대중까지 총 6명의 대통령과 함께했다. 그가 과학기술부 장관에 오른 건 김대중 정부 2기 때 일이다.   그는 칠순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취미로 무선을 애호하던 한 소년이 과학 기술을 천직으로 삼아 어느덧 고희를 맞이했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그만큼 서 전 장관은 늘 인재 양성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공직 생활 이후에는 KAIST 강의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매번 메모 습관을 강조했다. 서 전 장관 역시 늘 수첩과 볼펜을 가지고 다니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고 또 적었다. 그의 메모 습관은 집필 활동으로 이어졌다.   서 전 장관은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저술가였다. 논문은 물론이고 10여편의 책을 집필했다. 생전 “한국의 미래는 글쓰기에 달려있다”며 “글을 잘 쓰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었다.   그는 1957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부임해 생도들을 가르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한 후 1970년 귀국해 국방과학연구소(ADD) 설립에 참여, 소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이동통신 사장, 초당대학교 총장, 한국과학기술원 원장, SK텔레콤 부회장 등을 지냈다. 상훈으로는 황조근정훈장(1992년), 국민훈장 동백장(1986년) 등이 있다.   서 전 장관은 부인 이정숙 여사와 사이에 3녀를 뒀다. 미주중앙일보 진성철 경제부장의 장인이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이며, 발인은 13일(한국 시간) 오전 10시 30분이다.  ▶연락:(02) 3410-3151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삶과 추억 과학기술 이동전화 총장 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부 장관 한국 과학기술

2024-01-11

[삶과 추억] 미국서 '한국식품 알리기'에 열정

해태 USA의 정정우(사진) 대표는 쌀과 이웃을 사랑했던 ‘따뜻한 사나이’였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은 물론 한인들이 모이는 행사장마다 반드시 한국 제품을 들고 나타났던 정 대표. 그를 기억하는 한인들은 뒤늦게 연신 아쉬움만을 내놓는다.     언론사를 방문해서도 항상 쩌렁쩌렁하면서도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망설임 없던 정 대표의 모습을 이젠 추억으로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서울대 수의과대학 74학년, ROTC 16기로 1983년 한국 해태상사에 입사해 1996년 해태 USA 주재원으로 큰 꿈을 품고 도미했다. 해태 USA를 독립 법인으로 키우며 별세 전까지 대표직을 수행했고, 노심초사 한국의 좋은 식품들을 미국 시장에 소개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의 노력과 한류 덕에 이제는 주변 아시안 커뮤니티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해태 제품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달 29일 오후 11시에 숙환으로 별세(향년 68세)한 그에게 유족은 부인 장태숙씨와 아들 정한얼·딸 정나리씨, 자부 김혜림씨와 손주 정수아양·정수혁군이 있다.   장례식은 오는 17일(화) 오전 11시 LA한국 장의사에서 엄수될 예정이며, 같은 날 오후 2시 30분 포레스트 론(Forest Lawn Hollywood Hill)에서 하관식이 예정되어 있다.   ▶연락:(818)939-3110, (818)618-4797 최인성 기자삶과 추억 미국 한국식품 한국식품 알리기 한국 해태상사 la한국 장의사

2023-10-03

[삶과 추억] 프린스턴신학대 이상현 박사 별세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교수로 활동했던 이상현(사진) 박사가 지난 4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이 박사는 세계적 석학이자 한인 1세대 신학자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명예의 전당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박사는 지난 1980년부터 31년간 이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교수로 활동하면서 아시아계미국인프로그램(AAP)도 개설했다. 미국 신학계에서 ‘아시안-아메리칸 신학’ ‘이민 신학’ 등의 용어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정립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이 박사는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5년에 뉴저지로 유학을 왔다. 이후 우스터대학교를 졸업,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호프칼리지에서 교수를 하다가 프린스턴 신학대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존 보울린 학장은 “이상현 박사는 일평생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에 대해 그 누구보다 깊이 연구했던 세계적인 학자였다”며 “그의 유산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뿐 아니라 수많은 학생, 그가 양성한 목회자와 학자 등을 통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상현 박사의 장례식은 오는 15일 오후 3시 뉴저지 지역 킹스톤장로교회(Kingston Presbyterian Church)에서 열린다.   ▶문의:(609) 334-9097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삶과 추억 프린스턴신학대 이상현 프린스턴신학대 이상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이상현 박사

2023-09-08

[삶과 추억] 최대 한인 경제인단체 성장 이끈 큰 어른…장우상 월드옥타 초대회장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초대 회장을 역임한 장우상 명예회장(사진)이 이달 초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향년 97세.   LA에 있는 유족들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16일 가족장을 치른 뒤 18일 본부 사무국 등에 별세 소식을 알렸다.   옥타LA 전·현직 회장들과 회원들도 본부 옥타의 연락을 받고 뒤늦게 별세 소식을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월드옥타의 전신인 ‘세계해외교포무역인연합회’를 1981년 창립해 2년간 회장을 맡아 이끌었고, 이후 월드옥타가 68개국 143개 지회에 7600여 명의 회원을 둔 최대규모 재외동포 경제인단체로 성장하는데 ‘큰 어른’ 역할을 했다.   1970년 미국에 이민해 무역업을 시작한 고인은 ‘재미한인무역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1980년 회원들과 함께 세계 한인 무역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듬해 고국 수출상담회인 ‘서울교역전’에 참가한 16개국 101명의 한인 무역인을 중심으로 세계해외교포무역인연합회를 탄생시켰다.   초창기에는 정부 보조금 없이 회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협회를 운영하다가 1994년 상공자원부(현 지식경제부)에 사단법인으로 정식 등록하면서 재정이 나아졌고, 단체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국산 섬유와 철강을 수입해 미국에 팔았던 고인은 65세 되던 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월드옥타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주면서 후임 회장들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쏟아냈다.   고인은 2021년 5월 열린 제22회 세계대표자대회 및 수출상담회 개회식 때도 온라인으로 참가하는 등 변함없는 ‘월드옥타 사랑’을 보여줬었다.삶과 추억 경제인단체 초대회장 장우상 명예회장 한인 무역인 세계 한인

2023-08-18

[삶과 추억] 한인 정계진출 초석 다진 원로

미주 한인 민주당의 선구자이자 대부였던 박상협(영어명 리처드 박·사진) 한인민주당협회(KADC) 전 고문이 지난 28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은 주류 정계에 한인사회를 알리고 정치력이 성장할 수 있게 초석을 놓은 원로다. 한미민주당협회 결성에 산파역을 했으며, 주류 정치인들이 한인타운을 찾는 연결고리가 됐다.       고인은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평의원으로 시작해 수석당원, 재정위원, 아태자문관 등 40여년 이상 민주당을 후원하고 주류 정치인들과 교류해왔다. 고인이 가깝게 지낸 정치인들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빌 클린턴 전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상원의원, 알 고어, 존 케리 상원의원  등 거물급이다. 지난 2020년에는 조 바이든의 대선을 도왔으며, 버락 오바마(2012년) 재선도 지원했다.   고인은 유일하게 이들을 한인타운에 불러 한인사회 영향력을 넓힌 인물이기도 하다.     힐러리 클린턴의 열성 지지자였던 고인이 2007년 한인 타운에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초청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힐러리 클린턴 한인후원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은 고인은 옥스포드팰리스 호텔에서 100여명의 한인 후원자들이 참석한 기금모금 행사를 주최해 약 35만 달러의 후원금을 걷었다. 당시 모금한 액수는 지금까지 한인타운에서 모금한 정치인 후원금 중 최대 규모다.     이외에도 제리 브라운 가주 주지사, 테리맥컬리프 DNC 회장 등 굵직한 주류 정치인들을 타운에 초대해 한인 커뮤니티의 잠재력을 보여주고 차세대 한인들이 주류 정계와 네트워크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왔다.     2000년대 들어 한인 1세들이 잇따라 정치에 도전하자 든든한 후원자로 기금모금 등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1938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유학차 도미해 LA 인근 퍼시픽 주립대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한인타운에서 보석상, 총기상을 운영했다. 또한 한국에 커피빈, 명품 브랜드 구찌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알렸다. 1972년 남가주 한인회 이사를 시작으로, 도산기념사업회 위원장, 나우경제인회 회장, 코리아타운번영회 회장, LA시 커미셔너, 민주평통 자문위원, 베벌리힐스 자매도시위원 등을 맡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한인사회에 봉사했다.     장례식은 7월 6일 오후 3시 할리우드 힐스 포리스트론 처치오브더힐(Church of the Hills)에서 치러진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낸시 박씨와 2남(제임스, 존) 5녀(제니퍼, 앨리스, 제니스, 제인, 지나)가 있다.     ▶연락:(213)255-8887 장연화 기자삶과 추억 클린턴 정계진출 힐러리 한인후원회 한인사회 영향력 한인 후원자들

2023-06-29

[삶과 추억] 평생 한인사회 봉사에 전념, 이민휘 회장 별세

미주 한인사회 원로 이민휘(사진) 회장이 지난 24일 오전 1시 10분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 이민휘 회장은 경기고와 동국대를 졸업하고 1956년 미국으로 유학, 샌호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이민휘 회장은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한인회장을 시작으로 한인사회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1971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이 되면서 이민사회 단체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 한국 라디오 및 TV 방송 회장, 1974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제9대 회장 재선, LA 한인회 회장, 재미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5년 미주한인회총연 제16대 회장에 이어 2006년 미주 동포후원재단 초대 이사장 등 평생을 미주 동포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교민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미주 동포후원재단을 설립해서 차세대 지도자 육성 및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힘썼다.     미주 한인사회 공헌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 체육훈장 거상장,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체육훈장 거상장, 호국영웅기장, 5.16 민족상 등을 수훈한 바 있다.   2020년 출판한 일대기 ‘외길’에서 그는 “한인사회는 내 인생의 애환이 서린 내 몸 같은 것”이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이민휘 회장의 아버지는 독립지사인 운호 이규갑 선생이다. 그리고 빈장(장인)은 애국지사인 연당 이갑성(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분) 선생이다.     유족으로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제작자로 활동하는 필립 리, 사이먼 리 두 아들이 있다. 유족 측은 장례일정이 정해지는 대로 추후 공지할 예정이다. 이은영 기자삶과 추억 한인사회 이민휘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 이민휘 회장 미주 한인사회

2023-06-25

[삶과 추억] 한인타운 부동산업계 산증인

한인사회에서 묵묵히 봉사하며 후진을 양성해온 올드타이머 로버트 리(이리섭.사진) 전 LA코리아타운 라이온스클럽(구 올림픽 라이온스 클럽) 회장이 4일 별세했다. 80세.   LA한인회 이사장으로도 봉사한 고인은 부동산 업계에 종사하며 초창기 LA한인타운 형성에 기여한 대표적 올드타이머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인은 전북 남원 출신에 중앙고와 연세대 의예과를 거쳐 1965년 미국으로 이민 왔으며 텍사스 A&M 대학을 나왔다. 1972년 LA에 정착해 한팩코 부동산을 운영하며 커뮤니티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바 있다. 지난 2000년 LA라이온스클럽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1970년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올림픽가에 마킷, 식당, 상점 등 한인 사업체가 들어서면서 형성된 타운의 부동산 매매내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자세히 알고 있다”면서 “이같은 경험을 살려 LA라이온스 클럽이 타운의 성장에 꼭 필요한 봉사단체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고인은 LA 한인회 이사 및 이사장, LA 한인상공회의소 이사, 코리아타운교민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남가주 전의·예안 이씨 화수회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장례는 오는 3월 2일(목) 오후 2시 30분 포레스트 론 할리우드 힐(Forest Lawn Hollywood Hills Old North Church 6300 Forest Lawn Drive Los Angeles, CA 90068)에서 열린다.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근조 화환과 조의금은 정중히 사양하며, 접수되는 조의금은 커뮤니티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부될 예정이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삶과 추억 부동산업계 한인타운 한인타운 부동산업계 초창기 la한인타운 la라이온스클럽 회장

2023-02-28

[삶과 추억] '사형수 이철수씨 구명'…유재건 전의원 별세

남가주 한인사회 올드타이머이자 한국 국회의원 3선 출신인 유재건(왼쪽 사진) 변호사가 한국시간으로 1일 오전 9시 서울에서 별세했다. 85세.   ‘평화·인권·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모토로 삼았던 고인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이민법 세미나를 개최하고 무료법률 상담을 진행하는 등 힘들고 어려운 한인들을 돕는데 앞장섰던 법조인이자 리더였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도중 기자였던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졸지에 소년가장이 됐다. 생계를 위해 새벽엔 신문 배달을, 밤이면 모친이 만든 찹쌀떡을 팔러 다녔지만, 경기중·고교를 거쳐 연세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특차입학했을 만큼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졸업 후 정치외교학 석사학위를 받고 공군 장교로 4년간 복무한 후 한국 유네스코위원회에서 3년간 근무한 고인은 1969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왔다.     워싱턴 주립대에서 평범하게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던 그는 미국 판사의 권유에 따라 법대에 진학하고 무려 9번의 고배 끝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모친의 비자 연장을 거부하고 추방 절차를 밟는 이민법원에 출두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설명하는 그를 지켜본 담당 판사가 법대에 진학하라고 추천한 게 계기가 됐다.     ‘이철수 사건’은 고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다. 1977년 신문기사를 통해 살인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된 이철수(당시 25세) 사건을 접한 그는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결국 사건 발생 1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10년 만에 감옥에서 석방된 이철수 재판은 법대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소수계 인권 변호에 한 획을 그은 케이스로 남았다.     지난 2017년 5월 페퍼다인대 교환 교수로 부임했을 때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고인은 당시 심정을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고 나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분명 정의는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힘겨운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본지 2017년 5월 8일자 A-14〉   1990년 한국으로 귀국해 MBC 시사 토론 프로그램과 KBS 심야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로 이름을 알렸던 고인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추천으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직을 맡고 정계에 입문했다. 1996년 출마한 성북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3선 의원을 물리쳐 스포트라이트를 뜨겁게 받은 그는 이곳에서 내리 3선을 기록했다.     1997년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 특보단장을 맡아 킹메이커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재임 시절 한미의원외교협의회의 회장, 국회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간판 외교통·미국통으로 활약했던 고인은 2008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자유선진당 창당을 도운 걸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후 한국유스호스텔연맹 총재, 제3대 CGN TV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성수씨와 2남 1녀가 있다. 고인의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5일.  ▶연락: (02)3410-6917     장연화 기자삶과 추억 사형수 이철수 이철수 재판 이철수 사건 한국 국회의원

2022-12-01

[삶과 추억] 1.5세 한인교사 왕내희씨…GUSD 한국어 강의 최초로 도입

글렌데일통합교육구(GUSD)에 처음으로 한국어 이중언어 프로그램을 도입한 1.5세 한인 교사가 최근 지병으로 별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역 한인 학부모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GUSD 지역 한인 학부모 커뮤니티는 최근 마크 케펠 초등학교의 왕내희(사진) 한국어 반 교사가 지난 8일 암으로 사망했다는 부고를 공지했다. 향년 55세.   고인은 15년 전 글렌데일 교육구에 한국어 이중언어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한 교육자다. 연방 정부가 지원하는 외국어 교육 프로그램 ‘플래그(Flag)’를 통해 한국어 이중언어 프로그램을 개발해 마크 케펠 초등학교에 처음 도입했다. 그녀가 개발한 플래그 한국어 이중언어 프로그램은 나중에 다른 이중언어 프로그램의 모델이 됐다.     당시 마운틴애비뉴 초등학교에서 킨더가튼반을 가르치는 교사였던 고인은 교육구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학생들의 학습능력이 향상된다고 설득해 관철했으며, 한국어 이중언어 프로그램 설치 기금도 직접 연방정부에 신청해 받아내기도 했다.     또 공립학교에서는 처음으로 마크 케펠 초등학교에 5000여권이 넘는 한국어책을 갖춘 도서실을 만들어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무료로 책을 빌려볼 수 있도록 하는 등 글렌데일 지역에 한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한국어 이중언어 프로그램이 점차 지역 한인 학부모들과 타인종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자 교육구는 점차 프로그램을 확대, 현재 6개 학교가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평생 교직에 전념한 왕 교사는 7세에 가족을 따라 미국에 이민 온 1.5세로 캘스테이트LA에서 아동발달학을 전공하고,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인의 장례식은 오는 22일(화) 오전 11시 라크레센타 세인트루카교회(2563 Foothill Blvd, La Crescenta)에서 진행된다.     한인 학부모들은 고인의 장례식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추모 웹사이트(everloved.com/life-of/naehi-wong/?flow=264)를 통해 모금도 진행하고 있다. 또 마크 케펠 초등학교의 한국어 도서실을 ‘왕내희 도서실’로 명명하는 것도 추진하고 있다. 장연화 기자삶과 추억 한인교사 한국어 한국어 이중언어 한국어 도서실 플래그 한국어

2022-11-18

[삶과 추억] 노광길 한미은행 명예회장, 한인 금융권의 산증인

LA한인경제계의 거목이자 한인 금융권의 산증인인 노광길(영어명 조셉 노·사진) 한미은행 명예 회장이 지난 13일(한국시간) 지병으로 작고했다. 81세. 유가족으로는 부인과 1남 1녀가 있다. 고인은 신병 치료차 한국에 체류 중이었다. 미국에서의 장례 일정은 곧 결정될 예정이다.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9년 서울사대부고, 1963년 서울 상대를 졸업했다.     1969년 한국화약 LA지사 주재원으로 미국생활을 처음 시작한 고인은 70년대 조셉 노 보험회사를 설립하고 사업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1987년부터 2002년까지는 코리아 플라자 LP의 파트너, 2002년부터 2010년까지는 J&S 인베스트먼트의 대표를 맡으며 한인경제 성장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82년 창립된 한미은행의 이사로 1984년에 합류한 후 35년 간 이사와 이사장으로 재임했다. 특히 그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처음 이사장을 맡은 후 한미 성장에 크게 기여했으며 2007년부터 13년간 두 번째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고인은 2019년 5월 한미은행 주주총회에서 은퇴하고 난 후에도 명예회장으로서 주요 비즈니스 개발, 전략적 아젠다 등에 대한 조언과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고인은 은퇴식에서 “지난 35년간 한미 이사회에서 일한 것에 대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한미가 전국 9개 주에서 35개지점을 두고 뱅킹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도적인 커뮤니티 은행으로 성장할 수 있어서 크게 감사한다”고 소감을 전한 바 있다.     바니 이 한미은행 행장은 “큰 별이 졌다. 한인 및 지역사회와의 동반성장이라는 노 명예회장의 경영이념(Legacy)과 탁월한 리더십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진성철 기자삶과 추억 한미은행 명예회장 노광길 한미은행 한미은행 주주총회 한미은행 행장

2022-10-17

[삶과 추억] 국군포로송환위 정용봉 회장 별세…한인사회 발전에 큰 족적

국군포로송환위원회 회장 정용봉 박사(영어명 토마스 정·사진)가 6일 오전 4시 45분 시더스-사이나이 병원에서 별세했다. 95세.   1927년 경남 김해군 진영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8년 몬태나주립대로 유학 왔다가 LA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정착했다.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가발사업에 진출한 그는 사업체 ‘히즈앤허헤어굿스(His & Her Hair Goods)’를 통해 가발제작 특허를 받고 큰 성공을 거뒀다.     나라은행(뱅크오브호프의 전신) 이사장을 거치며 인수합병을 통한 한인 은행의 대형화에도 기여했다. 특히 지난 2003년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회장을 맡아 패서디나의 로즈퍼레이드에 꽃차를 출품하는 등 한인 이민역사를 주류사회에 홍보하는데 진력했다. 연방 의회가 매년 1월 13일을 ‘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로 지정하는데에도 힘을 보태며 한인 커뮤니티의 사회.경제적 성장에 디딤돌 역할을 해왔다.   이에 앞서 1997년에는 부인과 본인의 이름을 딴 ‘샤니 앤 토마스 정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모교인 서던일리노이대학(SIU)에 150만 달러의 장학기금을 기부해 매년 20~30명가량의 학생에게 학비 지원도 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인 그는 국군포로송환위원회를 만들어 한국과 미국 의회를 상대로 전쟁포로 석방 캠페인을 전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난해 7월 한국 정부는 고인의 공로를 인정하는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고인은 지난해까지도 자비를 들여 맥아더 파크에 한국전쟁 기념벽화 제작을 LA 시정부와 함께 추진했다. 또 고 김영옥 대령에게 연방 의회가 제공하는 최고 무공훈장으로서 대통령이 수여하는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하는 캠페인과 샌피드로 ‘우정의 종각’ 인근 부지에 한국전 참전 16개국 기념공원(가칭)을 설립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노력해왔다.   한편 국군포로송환위원회는 장례일정이 나오는 대로 공지한다고 밝혔다. 추모 분향소는 LA한국교육원(680 Wilshire Pl.)에서 11~13일 오전 11시~오후 4시 운영된다.   장연화 기자삶과 추억 국군포로송환위 한인사회 국군포로송환위원회 회장 국군포로송환위 정용봉 한인사회 발전

202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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